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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e Founder

황의중, Eui Joong Hwang (1927~2016)

대한민국 해방 전, 체신학교 시절.

통신국장 시절.

회고 1.

해운계는 나의 고향입니다. 해방 직후 목포해양무선국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던 나는 1948년 승선하여 선박무선을 설립한 1961년까지 13년간 해상과 육상에서 절반씩 근무하였습니다. 해방 당시의 국적선은 김천환, 천광환, 천안환, 일진환, 이천환, 앵도환 등 지금도 모든 국적선의 이름을 다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몇 척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선복의 전부였으며 톤수로 하면 1만톤에 불과했습니다.

6.25동란 당시의 한국에 선박보유량은 미국으로부터 대여 받은 LST(2700톤)라는 상륙정 16척과 FS(530톤)라는 연안식량보급선 10여척과 약간은 배 같은 모양의 Boltic형(1800톤) 6척을 합하여도 총 5만톤에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도 6.25동란이 터지자 우리는 그 Boltic형은 전부 일본 요고쓰가 미 해군기지에 반납하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반납하고 돌아올 때의 우리들의 불안감, 절망, 울분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갑니까?

현재는 어떠합니까? 1천만톤이 휠씬 넘는 세계 유수의 대 해운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업의 수준은,  내가 처음 배를 타러 부산에 왔을 때 현재의 한진중공업은 부산항만청 내의 한낱 조선과에 불과하였습니다. 1950년대에는 우리에게 100톤짜리 어선도 건조할 능력이 없어서 프랑스와 이태리 조선소에서 100척의 어선을 건조해 들여왔습니다. 왜 가까운 일본을 두고 머나먼 유럽에 까지 가서 건조하여야 했는지 그 사정은 이러합니다. 정부에서 어렵게 차관으로 300척분의 어선건조의 자금을 마련하여 일본에 건조를 의뢰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있었던 한일 어업마찰로 거절 당하자 하는 수 없이 유럽에 건조를 의뢰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양길에 있는 프랑스와 이태리의 조선소에 살 길을 터 주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럽의 건조비가 일본보다 높아서 목표로 했던 300척은 우리의 실정에 맞지도 않는 100척의 어선으로 줄어들어 들어왔고, 일본 조선소는 300척의 일감을 잃었습니다. 서로가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에 한국과 일본은 상호 보완하는 지혜를 배웠고 1965년 한일협정 이후 무제한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은 VLCC의 건조로부터 시작하였으며 조선소가 준공되기 전에 이미 수주를 받았다는  현대중공업 정주영회장의 그 얘기는 너무도 전설적이어서 그 분들에게 그저 머리가 숙여질 뿐입니다. 이제 독일 국적, 프랑스 국적, 이태리 국적 선박 등 전 세계 국적의 선박들을 건조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반드시 라고 할 정도로 MRC 마크가 붙은 장비가 납품됩니다. 조선소를 방문하여 방대한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어 세대로부터 영어 세대로 접어든 젊은 세대들이 고맙고 또 고마울 뿐입니다.

나는 며칠 전에 대구 북방 낙동강 기슭에 세워져 있는 다부동 전승비 옆을 지났습니다. 그리고 명상하였습니다. 대구에 있는 정부 및 시민들이 전부 부산 쪽으로 피난하고 미군들은 한국을 포기하고 철수를 준비한 절박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29세의 백선엽 사단장은 장병들을 모아놓고 훈시하였습니다. “내가 앞장 설 터이니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 만약 내가 겁에 질려서 도망을 치거든 너희들은 사정없이 나를 쏘아라. 그 대신 너희들이 도망가면 내가 너희들을 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켰던 나라입니다. 그 사단장은 나와 동년배로 지금 생존해 있으니 실화입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나는 같은 심정을 느낍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였습니다. 나는 마지막 최후의 순간까지 여러분들의 앞장에 서겠습니다. 항시라도 나에게 부도덕한 점이 있으면 나를 몰아내십시오. 그 대신 나도 여러분들에게 당부의 말이 있습니다. 기술이 좀 모자라는 것, 약간의 실수를 했다는 것, 학력이 좀 모자라는 것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자.” 이 한 마디만 당부 드립니다. 그러면 우리 선박무선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정성을 다 합시다!”


2000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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